심연 위의 불길
![]() | ![]() | 심연 위의 불길 - ![]() 버너 빈지 지음, 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 |
최근 상대성이론이 설정한 속도 한계에 시비를 거는 일들이 잦습니다. CERN 실험처럼 부주의로 판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얼마 전에는 호주의 수학자들이 빛 보다 빠른 움직임을 수용할 수 있도록 특수 상대성 이론의 방정식을 확장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수학자들의 작업이니 물리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는 곤란하지만, 오늘 소개하는 수학자 출신의 작품에 들어있는 설정도 비슷한 부류의 상상력이 동원된 듯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은하의 영역에 따라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계의 원리는 더 큰 원리의 근사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은하의 중심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지면 빛보다 빠른 여행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컴퓨터 등의 지능형 기계들이 더 스마트하게 작동할 수 있는 원리들이 동작한다고 가정합니다. 아주 바깥 영역으로 가면 이 경향들이 극단적인 수준에 도달해 초월적인 존재들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봉인되어 있던 초월적 존재를 풀려나게 하는 실수와 그로 인한 재앙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스페이스오페라 입니다. 은하규모의 사건이기는 하지만 여러 개체가 모여 하나의 정신을 구성하는 종족이 살고 있는 중세 풍의 행성도 중요한 무대중의 하나로 사용됩니다. 설정은 재미있고 아이디어도 꽤 풍부하지만 캐릭터는 별볼일 없습니다. 휴고상을 받은 작품이니 많은 분들이 재미있다고 평하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스케일에 매몰되어 디테일이 살아나지 못하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에서 약간 청소년물 냄새가 납니다. 이 분야에서 오래 작업해왔고, 그만큼의 명성을 갖고 있는 번역가의 작업임에도, 편집을 마무리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저기 물음표를 남발한 것은 아쉽습니다. (좀 화가 나서 원서를 대조해보니 과연 해괴한 단어들이 등장하더군요.) 이 외에도 이 책은 대한민국 출판사에 길이 남을 황당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1권이 나온 후 2권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년을 훌쩍 넘긴 후에야 출간한 것입니다. 저도 작년에 1권을 읽고 지금에야 2권을 보게 되었는데, 기억을 되살리느라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내용상 분권이 가능하다면 모를까 단지 두께 때문에 나눈 책을 이렇게 출간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