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 - 터
평창동이라는 마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고르라면 “산동네”다. 북한산의 남쪽 사면에 걸쳐 있으면서, 남쪽으로는 북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지형을 보자.
마을을 지나는 주도로는 북한산과 북악산 사이를 가로질러 북악터널로 이어진다. 그 옆의 두 줄로 표시된 도로는 내부순환로다. 마을의 낮은 곳은 해발 고도가 70m 정도인데, 북쪽 경계는 보현봉 능선에 닿아 700m를 넘는다. 한 동네 안에서 600m 이상 오르내리는 셈이다.
주거지역은 도로가 얽힌 곳으로 대충 파악이 될 것이다. 산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주거지역에서도 가장 높은 곳은 270m에 이른다. 남산 정상이 270m, 평창동과 청와대 사이를 가르는 북악산이 340m이니, 상당히 높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평창동의 기원은 1712년(조선 숙종 때)에 설치한 평창(平倉)이라는 이름의 창고로 알려져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나온다고 하여 찾아보니, 본지도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 밖 10리까지 자세히 그려 따로 붙인 경조오부도라는 지도에 나온다. 평(平)은 글자만 보면 평평하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특별한 이름이라기보다 선혜청 관할 창고를 가리켜 쓰는 흔한 말이었다고 한다. 마을 한편에 서 있는 평창길 안내판에서는 가장 큰 창고라고 주장하는데,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자리에 표석이 서 있어서 300년이 지난 지금도 평창 터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서남쪽에 표시해 두었다.
주도로가 이어지는 낮은 곳에 인접한 마을이 신영동인데, 조선 시대의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총융청이 있던 자리다. 부대 근처라 조그만 마을이 따라왔을 수도 있는데, 큰 마을이 들어서지는 못했나 보다. 박정희 정권 초기만 해도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어 둬서 그냥 산골이었단다. 그러다 1968년 김신조 사건이 터진다. 북한산을 타고 북에서 내려와 북악산을 넘어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이 루트가 딱 지금의 평창동을 지난다. 실제 동선은 계획에서 옆으로 살짝 돌아간 것 같지만, 이 사건 이후로 등 뒤의 깊은 숲이 좀 불안했던 것 같다. 그 후로 개발 제한을 완화하고 마을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름의 기원은 아득히 멀리 있지만, 마을 자체의 기원을 조선 시대에서 찾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마을의 가운데라기보다는 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낮은 지역이어서 해발 고도는 130m 정도다. 어쨌거나 마을은 산비탈을 기어오르며 확장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아마 주거지역이 저 정도에서 멈춘 것은 이런저런 개발 제한이 걸려 있어서일 거다. 풀어줬다면 어디까지 갔을까?